어릴 적엔 제 이름에 들어간 '원' 이 으뜸 원(元)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풀이한 저는 그야말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으뜸 가는 재상' 이라니! "긍게 우리 손주 국무총리까지 할 사람이라 혔다 안허냐." 이모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점을 보셨던 할머니의 말씀. 할머니께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전 국무총리가 되기엔 어려운 몸입니다. 아무렴, 서울대도 그래서 안 갔어요. 진짜로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 으뜸 가는 재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밝혀진 경악스러운 진실은 '원' 이 으뜸 원이 아니라 강 이름 원(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미는 개뿔, 이름으로 만든 이름인 거예요. 어쩌겠습니까, 하물며 포도도 포도 포(葡)에 포도 도(萄)를 쓰는 것을.
으뜸 원 자에 삼수변. 어쩐지 며칠 전에 본 사주에서 물이 많다고 하더라니요. 물이 많으니 심성이 차분하고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생각과 행동에 깊이가 있다고 침을 튀기며 얘기하시던 그 할아버지는 당신 사주를 소개하는 것마냥 신나보이셨죠. 한 것도 없이 그저 태어나기만 한 저지만 보람은 찼습니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재미로 보겠다고 찾아간 사주집에서 재미 좀 봤으니, 이보다 수지 맞는 장사가 없네요.
힘찬이는 힘내고 싶지 않아도 힘차야 하고
우리는 때려죽여도 우리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도 우리여야 하고
대한이는 얼어 죽을 조국의 남아여야 하고
요셉이는 날 때부터 죄인이어야 하겠네
-이원재, 이름에 대한 몇 가지 단견 中-
정해진 운명대로, 타고난 이름대로만 산다면 안정적일지는 몰라도 재미는 무지하게 없겠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정해진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말 그대로 무슨 짓이든 허무할 뿐이니까요. 노력을 왜 하겠어요, 당장 뭘 하든 국무총리가 될 운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제가 대문호가 될 팔자라고 믿는다면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무슨 일을 할지는 오로지 순간순간을 겪는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해요. 뭘 할지 생각하고, 생각한 걸 행동에 옮기는 거요. 백날 '난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아' 라며 어설프게 자기 위로하는 것보다 좋은 일을 한번 하는 게 낫고,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것보다 한번 해보는 게 맘 편합니다.
정해진 게 있다면 우린 언젠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뿐이겠죠. 전 그 전까지 무엇을 꿈꾸고, 이루며, 남길지는 사주나 운명에 맡기지 않으려 해요. 끝으로 시 몇 줄 남기면서 글을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내 이름은 아무개요, 하더라도 개명하면 그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하더라도 내 숨 끊어지면 그만
그 문장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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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이름 몇 자로 대변되기엔
너무나도 황홀하고 감친 삶이기에
-이원재, 이름에 대한 몇 가지 단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