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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에세이 쓰기

남산에서 후배들한테 맞은 썰 풉니다.

by 이왕이면고기를먹는애 2022. 11. 15.

 유난히도 컸던 친구의 코골이로 밤잠을 설치고 나선 아침의 홍대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한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치킨과 데낄라라는 요상한 조합으로 달린 뒤라 아침부터 약속을 나가는 게 조금은 벅차더라고요. 자취방 바닥에서 잠든 탓에 배기는 등은 덤이었죠.

 

 하라는 남산 얘기는 안 하고 웬 생로병사의 비밀 -식습관 및 수면 습관 편- 에서나 들을 법한 얘기는 왜 하냐고요? 이 일정이 제게 꽤나 무리였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패턴은 아니었다 이거죠.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행복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법입니다.

동대입구역에 도착하니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기 시작했다

  을지로3가를 거쳐 3호선의 동대입구역에 내리니, 먼저 와 있던 후배님이 씩씩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저를 맞아줬습니다. 20분 정도 일찍 온 건데도 이미 도착해있는 후배님을 보니 역시 직속 과 후배는 다르구나 싶었어요(라고 쓰라고 함).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바라본 하늘은 제법 맑았습니다. 흐릿하다 못해 어둑하기까지 했던 홍대의 아침 하늘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죠. 뒤이어 다른 후배까지 오고 나니 완연한 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사진을 못 찍어서 그렇지 풍경은 정말 끝내줬다구요

 그리고 이 날씨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습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우리나라의 가을이 이렇게도 생생히 살아있었다니요. 남산 둘레길 초입부터 진한 단풍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빨갛고 노란 빛에 젖은 잎들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단어가 하나하나씩 떠올랐어요. 가령 낭만, 동화, 그리고 연애 같은 것들 말이지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린 정말 운이 좋았던 거였습니다. 오후가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렇지만 그건 등반(?) 후의 일. 그 전에 쏟아졌던 건 제 땀이었습니다. 감탄하면서 걷던 둘레길 끝자락에 다다르니 남산타워까지는 1,150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걸 가 말아-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우리 후배님들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지 뭡니까. 실행력 하나는 저보다 선배님들이세용ㅎㅎ..

남산에 올라가는 동안에는 힘들어서 찍은 사진이 없으니 제 셀카로 대체합니다(Thanks for my 저질 체력).

 요전에 '요즘 수영하니까 체력이 늘었다'고 말한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남산 왜 이렇게 높은가요?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체중계를 올라가 보니 알 것 같아서 그만 얘기할게요.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가다 잠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반팔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수건도 야무지게 목에 걸쳐놓았네요. 누가 보면 전문 등산인인 줄 알겠어요. 근데 너 제일 늦게 올라갔잖아...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본 직속 후배님, 안쓰러웠는지 옆에서 도발과 격려를 적절히 섞으며 같이 계단을 올라주셨습니다. 역시 직속 후배는 다르네요(라고 쓰라고 함2). 수영 말고도 운동을 더 많이&열심히 해야겠더라고요.

"돈까스를 만들려면 우선 고기를 두들겨 육질을 부드럽게 해줍니다"

 정상에 다다라 그~렇게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한 걸 보면 아재는 아잽니다. 맞을 만 했어요.

 

 아 참 오해는 마세요, 진짜 맞진 않지 않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 산행으로 관악산을 가자고 하더라구요. 살려줘 얘들아 제발... 

찍으라는 자물쇠는 안 찍고 이런 걸 찍었니 과거의 나야?

 이렇게 처음 올랐던 남산. 산은 산이라고 정상에 오르니 나름 기분이 좋았습니다. 미세먼지만 아니었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하면서 경치 구경, 사람 구경을 하고 있자니 그 유명한 자물쇠도 보였어요. 

 

 비바람에 못 이겨 녹슬고 해어진 게 대부분이었지만, 채워진 자물쇠에 수놓인 사람들의 들뜬 맘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모습도 그와 멀지 않은 듯해요.

좋은 날도 한때가 되어 바래버리고

소중한 것도 다 잊힌 줄로만 알지만

 

색색의 값진 일로 삶을 채우고

마음이 단단히 채워져 있는 한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겁니다.


 저도, 이렇게 짧게나마 지난 가을날의 기억을 글로써 채워봅니다. 아마도 이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네요. 

 물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면서 살자구요 :)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이고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