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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에세이 쓰기

끝이 있음에 감사하기

by 이왕이면고기를먹는애 2022. 10. 15.

비 오는 구로디지털단지역의 토요일 저녁 6시 반.

 역 앞엔 '깔깔거리'라는, 구로구의 홍대 거리라 할 만한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불콰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는 아저씨들, 한숨을 실은 담배 연기를 내뱉는 사람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연인들, 그리고 그들을 피해 종종걸음치는 제가 있는 곳이죠. 가끔은 길에 대책없이 뿌려진 유흥업소 전단지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가 오면 난리도 아니죠.

 

 지난 반 년 간 한 방송국에서 주말 야간 근무를 하느라 이곳을 지겹게 지나다녔던 제겐 지겹기 짝이 없는 풍경이지만서도, 사뭇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애초에 비도 오로지 집에 틀어박힌 채 창밖으로 볼 때만 좋아하던 저지만 오늘은 괜스레 기분이 묘합니다. 바뀐 풍경이라곤 망한 술집 대신 들어온 족발집뿐이지만, 오늘은 뭔가 다릅니다. 무엇이 제 마음가짐을 달라지게 했을까요? 무슨 TV 강연 프로그램 중간광고 전에 나올 법한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합니다. 

 

곧, 이곳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거 알죠, 퇴사자 구분하는 법! '빨리 이 바닥 뜬다' 이러는 사람도 아니요, '나 퇴사할래' 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요, 어느날부터 왠지 모르게 온화하고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는 사람이 곧 나갈 사람이라는 말.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었습니다그려. 이번 달 말까지만 근무하고 이제 그만두게 된 저도 역시 왠지 상냥해졌으니 말예요.

 

 떠나는 게 이 방송국뿐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잠시 떠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이 풍경이 제겐 자못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정확히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특별해졌습니다. 지금도 제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뚝 솟은 옆 동의 아파트,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놀리던 학교 앞 거리, 매주 가는 수영장 근처의 대체 공사가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는 공사장, 그리고 불야성을 이룬 깔깔거리의 밤까지. 뻔하고 지루했던, 어떨 때는 이유 모를 성까지 내게 했었지만, 저는 압니다. 언젠간 제가 이 모든 걸 그리워 할 거라는 걸요.

 

 흔히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란 말을 합니다. 전 그 반대도 맞는 말이라 생각해요.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무언가를 끝냈다는 것과 같습니다. 더이상 그 전처럼 살지 못하거나 않겠죠.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할 거고요. 그러니 모든 시작은, 조금은 겁이 납니다. 제가 지금 그런 것처럼요.

 

 하지만 지내왔던 일상에 감사할 기회가 생기니 힘이 납니다. 이 감사한 시간동안 많이 만나고, 많이 걷고, 많이 먹어야죠(?).

 

끝이라는 건 참 귀합니다.

그게 바로 출국을 한 달 앞둔 제가,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을 더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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