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첫 아르바이트 면접의 긴장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탄 건 형의 차였다.
그래도 면접이랍시고 차려입은 옷이라 그랬던 건지, 처음으로 타보는 남의 차 조수석이라 그랬던 건지 하여튼 첫 데이트라도 하는 것마냥 어색했다.
“아유, 잘 지내셨어요, 형님? 와, 진짜 오랜만이네요. 한 3년만에 보는 거 아녜요?”
“그니까. 네가 연락을 좀 안 받아야지, 이 쉐끼 이거.”
바다나 보러 가자, 막 차에 오른 내게 형은 그렇게 던지듯 말했다. 진짜 남자들끼리 데이트라도 하는 거냐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삼월이긴 하지만 아직 쌀쌀하니 겨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날씨에 바다 보러 가기? 여름의 북적대는 해변가보다는 겨울 바다의 적막함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좋은 구경일 것 같았다.
소나기가 내린다는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듯, 날이 나쁘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해가 꽤 늘어져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서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바람도 거세졌다. 영종대교 위를 지날 때는 차체가 흔들거릴 정도였고, 자타공인 겁쟁이인 나는 어느새 조수석 위쪽에 달린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너무 꽉 쥔 나머지 저리기까지 한 손을 털며 내린 곳은 영종도의 어느 포구. 포구라곤 했지만 썰물 때라 보려는 바다는 안 보이고 뻘만 보였다. 바다 근처에서 사면 눈탱이 맞는다며 기어코 집 근처 시장에서 떠 온 회 봉다리를 들고 차에서 내리려니 웬걸, 바람이 말도 아니었다. 바닷가에 부는 바람은 더 거세다는 간단한 사실을 잠시 잊었다. 차 안으로 일단 후퇴한 우리는 회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우릴 놀리듯, 탐스런 아나고 회의 부슬부슬한 살결은 랩 안에 고이 누워있었다. 그렇게 '포구에 앉아 기분 내면서 회를 먹자' 라는 원대한 계획이 틀어지는가 싶었다.
뭐 어디 정류장 같은 데 앉아서 먹죠, 입을 떼려는데 예의 그 손가락 튕기기를 하며 형이 한마디했다.
"야, 그냥 차에서 먹으면 되잖아?!"
차 안에서 먹는 회는 기분상 평소에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회를 즐겨먹지도 않는 내가 열심히 집어먹었던 것을 보면, 바다가 주는 무언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분명 사진을 보고 모양 빠지게 저게 뭐냐고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바람 쐐자고 창문을 지잉- 내리자마자 상추가 카시트 위를 날아다니는 판국에 이 정도면 선전한 셈이다. 아무렴 맛 좋고 기분 좋았으면 그만이지.
스티로폼 껍데기와 초장만 남기고 야무지게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아니 차에 이미 올라있긴 했지.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형이나 나나 명색이 서해 쪽에 왔는데 바다라도 좀 제대로 봐야되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디저트로 바나나 우유 한 개씩 쪽쪽대며 도착한 곳은 영종도의 또다른 끝, 다른 쪽의 해변이었다.
웬걸, 성난 파도란 말이 왜 그토록 클리셰가 될 정도로 쓰인 수사인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파도가 말 그대로 사납게 몰려오고 빠지고, 몰려오고 빠지고 하며 발을 구르고 있는게 아닌가. 화폭에 그린듯 세밀하고 난폭하게 부서지는 흰 물거품과, 그 위 구름 뒤로 어른거리는 빛무리를 단 태양. 이거야말로 장관이 아닌가 싶었다.
연인도 아닌 둘이 해변가를 나란히 걸었다. 이곳도 바람이 얼마나 강하던지, 갈매기들은 제자리에서 날아가질 못하고 마치 정지 비행을 하듯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장관이 따로 없는 초현실의 세계. 게임이었다면 그래픽 오류 버그라도 난 거냐며 바로 신고를 넣을 수도 있는 정도였다.
정통으로 맞아드는 바닷바람에 면접이랍시고 헤어젤로 올린 머리칼이 산발이 됐다. 시큰하게 콧날도 시렸다. 거짓말 아니고 '눈썹이 휘날리게' 라는 표현도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속눈썹을 간질여 눈물이 났다. 바람이 너무 강하면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사람을 강제로 울게 만드는 이놈의 바닷가란.
차 안에 돌아와서 안경을 보니 아주 미세한 물방울들이 말라 붙어있었다. 분명, 힘 센 바람에 함부로 몸을 맡겨 부서진 파도 자락이었으리라. 눈에는 보이지 않던 조그마한 것들이 바로 내 눈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게 또 각별하다. 안경닦이로 부셔도 물티슈로 문질러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던 물 자국, 그처럼 그날의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제야 알았다.
바다와 바람 그 둘만 있다면, 누구와 있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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