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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에세이 쓰기

바다, 바람

by 이왕이면고기를먹는애 2022. 10. 15.

올해 3월, 첫 아르바이트 면접의 긴장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탄 건 형의 차였다.

 

 그래도 면접이랍시고 차려입은 옷이라 그랬던 건지, 처음으로 타보는 남의 차 조수석이라 그랬던 건지 하여튼 첫 데이트라도 하는 것마냥 어색했다.

 

“아유, 잘 지내셨어요, 형님? 와, 진짜 오랜만이네요. 한 3년만에 보는 거 아녜요?”
“그니까. 네가 연락을 좀 안 받아야지, 이 쉐끼 이거.”

 

 바다나 보러 가자, 막 차에 오른 내게 형은 그렇게 던지듯 말했다. 진짜 남자들끼리 데이트라도 하는 거냐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삼월이긴 하지만 아직 쌀쌀하니 겨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날씨에 바다 보러 가기? 여름의 북적대는 해변가보다는 겨울 바다의 적막함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좋은 구경일 것 같았다.

 소나기가 내린다는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듯, 날이 나쁘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해가 꽤 늘어져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서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바람도 거세졌다. 영종대교 위를 지날 때는 차체가 흔들거릴 정도였고, 자타공인 겁쟁이인 나는 어느새 조수석 위쪽에 달린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너무 꽉 쥔 나머지 저리기까지 한 손을 털며 내린 곳은 영종도의 어느 포구. 포구라곤 했지만 썰물 때라 보려는 바다는 안 보이고 뻘만 보였다. 바다 근처에서 사면 눈탱이 맞는다며 기어코 집 근처 시장에서 떠 온 회 봉다리를 들고 차에서 내리려니 웬걸, 바람이 말도 아니었다. 바닷가에 부는 바람은 더 거세다는 간단한 사실을 잠시 잊었다. 차 안으로 일단 후퇴한 우리는 회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우릴 놀리듯, 탐스런 아나고 회의 부슬부슬한 살결은 랩 안에 고이 누워있었다. 그렇게 '포구에 앉아 기분 내면서 회를 먹자' 라는 원대한 계획이 틀어지는가 싶었다.

 뭐 어디 정류장 같은 데 앉아서 먹죠, 입을 떼려는데 예의 그 손가락 튕기기를 하며 형이 한마디했다.

 

"야, 그냥 차에서 먹으면 되잖아?!"

차에서 즐겼던 회. 대시보드 위 놓인 초장과 마늘이 제법 웃기다.

 차 안에서 먹는 회는 기분상 평소에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회를 즐겨먹지도 않는 내가 열심히 집어먹었던 것을 보면, 바다가 주는 무언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분명 사진을 보고 모양 빠지게 저게 뭐냐고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바람 쐐자고 창문을 지잉- 내리자마자 상추가 카시트 위를 날아다니는 판국에 이 정도면 선전한 셈이다. 아무렴 맛 좋고 기분 좋았으면 그만이지.

 스티로폼 껍데기와 초장만 남기고 야무지게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아니 차에 이미 올라있긴 했지.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형이나 나나 명색이 서해 쪽에 왔는데 바다라도 좀 제대로 봐야되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디저트로 바나나 우유 한 개씩 쪽쪽대며 도착한 곳은 영종도의 또다른 끝, 다른 쪽의 해변이었다.

사진으로 전부를 담아낼 수 없는 성난 바다. 하늘에선 태양이 눈을 찔렀다.

 웬걸, 성난 파도란 말이 왜 그토록 클리셰가 될 정도로 쓰인 수사인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파도가 말 그대로 사납게 몰려오고 빠지고, 몰려오고 빠지고 하며 발을 구르고 있는게 아닌가. 화폭에 그린듯 세밀하고 난폭하게 부서지는 흰 물거품과, 그 위 구름 뒤로 어른거리는 빛무리를 단 태양. 이거야말로 장관이 아닌가 싶었다.

 연인도 아닌 둘이 해변가를 나란히 걸었다. 이곳도 바람이 얼마나 강하던지, 갈매기들은 제자리에서 날아가질 못하고 마치 정지 비행을 하듯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장관이 따로 없는 초현실의 세계. 게임이었다면 그래픽 오류 버그라도 난 거냐며 바로 신고를 넣을 수도 있는 정도였다.

본격 이고먹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 갈매기들의 정지 비행을 주목해서 보시길.

 정통으로 맞아드는 바닷바람에 면접이랍시고 헤어젤로 올린 머리칼이 산발이 됐다. 시큰하게 콧날도 시렸다. 거짓말 아니고 '눈썹이 휘날리게' 라는 표현도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속눈썹을 간질여 눈물이 났다. 바람이 너무 강하면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사람을 강제로 울게 만드는 이놈의 바닷가란.

 차 안에 돌아와서 안경을 보니 아주 미세한 물방울들이 말라 붙어있었다. 분명, 힘 센 바람에 함부로 몸을 맡겨 부서진 파도 자락이었으리라. 눈에는 보이지 않던 조그마한 것들이 바로 내 눈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게 또 각별하다. 안경닦이로 부셔도 물티슈로 문질러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던 물 자국, 그처럼 그날의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제야 알았다.
바다와 바람 그 둘만 있다면, 누구와 있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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