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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에세이 쓰기

늦잠

by 이왕이면고기를먹는애 2022. 10. 13.

이럴 거면 샤워라도 하고 나올 걸.


 떠나는 열차에 발끝을 밀어 넣었는데도 열리지 않는 전동문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때 아닌 가을비는 참 더럽게도 왔더랬다. 비바람을 헤치며 오랜만에 뜀박질까지 해서 잡은 버스의 바퀴는 계속 멈췄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그냥 불행인지- 모자를 쓰고 나와서 젖은 건 옷과 신발뿐이었다. 오케이, 30분 정도 늦잠을 잔 것까지는 내 과실, 인정할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24분 차라도 타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야? 역까지는 세 정거장이나 남았는데도, 시계는 이미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운전 참 올바르게 하신다, 싶었을 기사님의 느긋한 안전 운행을 원망하고 있었고, 역에 다 도착했을 때쯤엔 어느새 반쯤 벗겨진 그의 머리까지 흉을 보고 있었다. 터덜터덜, 찬바람에 속절없이 꺾이는 우산살을 부여잡은 채 역사로 걸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미 열차가 떠난 줄만 알았지. 어차피 지각이다, 급할 것도 없어 천천히 걸어 올라갔더니 전광판에 떠 있는 '당역 도착'. 뒤늦게 알아채고 에스컬레이터를 미끄럼틀 타듯 내려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글쎄 엄지발가락만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니까.

 아침 시간대만 되면 이놈의 시간표는 맞은 적이 한번 없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던 내 탓이라 하면 할 말 없다. 그렇지만... 대체 누가 버스도 아닌 열차 시간표가 칠, 팔분씩이나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어느 역사에 화재가 난 것도 아니요, 철도 노조가 파업한 것도 아니요, 하물며 무슨 시위도 없는 노선에.

 "애초에 늦잠 안 잤으면 이런 문제없었죠?" 하는 놈 있으면 나와서 손들고 서 있어라. 늦잠 안 자본 자만 내게 돌을 던져라, 하면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조차 날아올까 말까이건만. 자고로 사람에겐 피치 못할 사정이 필연적으로 생기는 법이다. 물론 어제의 그건 분명히 피할 수 있었던 약속이었지만. 어떤 약속은 피하면 곤란해지기 마련이니까.

 피할 수 없으면? 그냥 맞부딪치기야 하겠다만 그렇다고 어떻게 즐겨. 즐기진 못했다. 맞장구 적당히 쳐주고, 달달 떨리는 눈 근육으로 간신히 웃고 왔다. "우리 뇌는 억지 웃음과 진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해요!" 너도 나와서 아까 걔 옆에서 무릎 꿇고 있어라. 얼굴 당겨서 죽는 줄 알았다. 사회생활은 어려운 법이지 암.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마신 술은 더 깨기가 힘든 법이다. 그니까 이게 어디가 내 잘못이야!

 비 내리는 백마역.
 그 안엔 찝찝한 머리카락을 모자 위로 멋쩍게 긁어대며 그렇게 늦잠의 이유를 미뤄대는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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